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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달의 연대기 - 하늘과 별의 사이 4 [작가 정지오]
작성자 일병정지오 작성일 2018-03-18 15:39 조회수 612


저자 | 정지오

달의 연대기 - 하늘과 별의 사이 4


 짙은 홍색의 찻물에는 둥그런 레몬 설탕 한 조각이 동동 떠있었다. 홍차에 레몬이라니. 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는 호화로운 도자기의 손잡이 부분을 슬쩍 건드렸다. 삼십년 전에도 이처럼 여제와 찻잔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 여제는 일국의 군주가 아니었고, 당대의 샤를루아 공작은 필리프가 아니라 필리프의 아버지였다.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마음에 들지 않으냐?"

사내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여제는 여인의 교태는 없었으나 기품이 넘쳐흘렀다. 필리프는 이 나이 차 얼마 안 나는 고모와 유년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시간이 기억을 빛바래게 했어도 여제가 처녀 시절 얼마나 도도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났다.

"아뇨, 다만 생소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먼 땅인데 어찌 모든 것이 같겠느냐? 당연한 일이지."

필리프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내려놓았다. 새큼했다. 쉰이 되도록 여전히 아름다운 고모의 미모만큼이나 달았다. 그는 무심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모님께서 이리 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는 뭐, 알았겠느냐."

돌아온 대답은 대단히 담담했다. 하지만 그 속에 든 고생과 회한과 뿌듯함을 인생의 단맛 쓴맛 보며 정치가로 살아온 그가 모를까. 아무리 이 나라에서 황후가 황제 자리에 오른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반정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엘리엔 고모님."

페란토가 아니라 로렌에서 통용되는 갈리아 어였다. 반달 모양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옐레나 1세의 처녀적 이름은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였다. 여섯 대공가의 일원인 보르디 대공의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붓감이었다.

보르디 대공의 외동딸. 칼레 대공의 외손녀. 황후의 조카이자 세르의 약혼녀. 미래의 황후. 남쪽 제일의 미녀. 그 수많은 칭호들이 알알이 엮여 그녀의 머리칼을 장식하는 관이 되었다. 다른 이가 가지면 평생의 명예가 될 이름들이 그녀에게는 관에 박힌 보석 한 알에 불과했다.

보르디 대공가의 가세가 한창 기울었을 때인데도 다른 대공가들이 침을 질질 흘렸다. 채 초경조차 하지 않았을 때부터 들어온 혼담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르디 대공가의 여인들이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엘리엔의 이모 되는 황후까지 나서서야 상황이 겨우 정리 되었다. 열넷의 나이에 황태자인 루이 오귀스트와 약혼한 것이다.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그녀의 입지는 그야말로 반석이나 다름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황제가 나 자신이 곧 국가 운운해도 어느 대공도 입을 떼지 못 할 때였다. 모든 귀족들이 황제의 발가락 끝을 핥아보려 황도에 몰려들어 매일을 화려한 무도회와 살롱에서의 무위도식으로 보내는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그 속에서 엘리엔은 최고로 떠받들어지며 지냈다. 황후가 되리라는 미래, 앞으로도 이런 삶이 영원할 거라는 믿음은 짙은 녹음처럼 싱그러웠다. 다들 그 푸르름이 천국의 것인 줄 알았기에 시들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삼 년이었다.

황태자 루이 오귀스트는 엘리엔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오를레앙의 대공녀였던 마르그리트 안과의 비밀 결혼을 발표했다. 비밀 약혼도 아니고 비밀 결혼이었다. 그 발표 장소는, 대단히 비참하게도 엘리엔의 열일곱 살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던 거울의 홀이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마르그리트 안은 부모인 오를레앙 대공 부처조차도 죽었다며 쉬쉬하던 딸이었다. 다들 그녀의 동생인 루이즈 안이 오를레앙의 유일한 대공녀라 믿을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다. 시골의 작은 성을 받아 거기서 소박한 삶을 꾸려왔던 마르그리트는 스물일곱의 시골뜨기 노처녀였다.

그렇다. 스물일곱이었다. 황태자보다 세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엘리엔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아름답지도, 어리지도, 기품 있지도 않았다. 다소 책을 읽었다곤 해도 당시 다섯 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며 이미 사어가 된 페란토 어로 토론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엘리엔에 비하면 독서가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마르그리트에게 당대 최고였던 엘리엔이 밀려 떨어졌다.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이 소식에 사교계는 물 만난 오리 떼처럼 꽥꽥 울어대며 수많은 소문을 양산해냈다. 차라리 마르그리트가 미모 하나라도 특출하면 **라 깎아내렸을 테고, 뭐 하나 잘난 구석이 있었더라면 그를 아무 것도 아닌 걸로 만들려 안간힘을 썼을 테지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수많은 '더라'들은 엘리엔에게 숨겨진 커다란 흠이 있었을 거라고 소곤거렸다.

사실 엘리엔의 몸에는 큰 흉터가 있다더라, 대공의 친딸이 아닌 사생아라더라, 대공자의 사생아를 대공에게 입적해 키운 거라더라, 실은 그 성격이 다 연기라 하더라, 본성은 천박하기 그지없다더라. 세르께서 그녀의 침실에서 나오는 사내를 수도 없이 목격했다더라.

더라, 더라, 더라.

노란 더라는 빨간 더라를 빨간 더라는 파란 더라를 낳았다. 총천연색의 '더라'들은 흉흉할 정도로 빨리 번식했다.

지금껏 문제없던 행실까지 단숨에 까발려져 짓밟혔다. 모두 광기에 찬 듯 신나있었다. 그간 표출될 곳 없던 시기와 질투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더할 바 없이 음습했다.

나만 하는 게 아니야. 다들 이렇게 하는데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그런 모욕 속에서 엘리엔은 홀로 당당히 굴었다. 마치 귀가 먼 듯 초연했다. 완벽히 치장한 채 무도회에 등장했고, 아무리 무시 받아도 고고하기 이를 데 없이 굴었다. 침묵한 그녀를 대신해 발끈한 것은 가문이었다.

보르디 대공가는 황가에 폭풍과 같은 항의를 쏘아 보냈고, 칼레 대공은 아예 외손자인 황태자의 앞에서 지팡이를 내던지기까지 했다. 황후는 태자의 뺨을 후려 갈겼으며 황제는 대놓고 폐위를 입에 올렸다.

필리프는 그 당시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샤를루아 공작이었던 아버지는 잘 마시지도 못 하는 술을 잔뜩 마시곤 방 안을 서성이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웅얼거렸고, 조부는 그야말로 '격노'했다. 마르그리트의 친가인 오를레앙 대공가도 난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황태자에게 조심스럽게 파혼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마담 라 세르의 관은 절대 주지 못 하겠노라 버티는 황제와, 달라는 황태자의 팽팽한 싸움이 또 삼 년을 가면서 엘리엔은 스무 살이 되었다. 보르디 대공가는 마르그리트와의 혼약은 무효이니만큼 아직 엘리엔이 태자의 약혼녀라 주장했으나, 그 말은 힘을 잃었다. 마르그리트가 임신한 것이다. 황손을 사생아로 만들겠냐는 물음에 황가는 굴복했다. 세르 바로 아래의 남동생인 아르투아 공작 무슈 루이 페르디낭이 오랜 병치레 끝에 사망한 것도 한 몫 거들었다.

황후가 직접 마르그리트 안에게 태자비의 관을 건네주고 그녀를 공식적인 태자비-마담 라 ?세?르?(?c?e?r?f?)?-?로? 인정했다. 엘리엔은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해, 관례에 따라 마르그리트 안에게 한 쪽 무릎을 꿇은 다음 옷자락에 입을 맞추고 '신께서 축복하소서. 마담 라 세르께 경의를'이라고 말해야 했다. 거대한 치욕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종달새를 잡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 대관식에서, 엘리엔은 축하 사절로 온 북쪽의 대공을 만났고, 그와 혼인하여 옐레나 키릴로브나 대공비의 칭호를 받았다. 남쪽의 황후 자리는 빼앗겼으나, 결국 북쪽의 황태자비가 되었고, 황후가 되었고, 끝내 여제가 되었다.

여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남부 특유의 진한 녹색 눈동자에 부딪친 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말을 하려무나."

여제는 우아하게 차를 머금었다. 세월 때문에 약간 주름진 목이 꿀떡, 움직이는 모습조차 고상하게 느껴진다 하면 세상이 그를 얼간이 취급할까.

필리프는 무심코 후회하느냐고 물으려던 요망한 혓바닥을 슬쩍 깨물고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고모님께만 세월이 비껴나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리 늙었는데 고모님은 하나도 변하질 않으셨습니다."

"실없기는."

아름다운 고모를 연모하던 소년은 고모가 머나먼 북쪽으로 시집간다 하자 남몰래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다. 하지만 그도 잠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면서 추억은 마음 한 구석에서 먼지를 보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초상화 한 장 가진 것이 없었고 북쪽은 너무 멀었다. 간혹 아버지에게 서한이 올 때에나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싶었을 뿐이었다.

"옛날엔 아교 먹인 활줄인 양 뻣뻣하더니 세월이 무섭긴 무섭구나. 네 혓바닥이 그리 잘 돌아가는 것을 보니."

"거울을 아니 보시나 봅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걸 보면."

"거울이 고운 얼굴만 비추겠느냐. 미운 모습만 들추는 것이 거울 아니냐. 다른 이야기를 하자꾸나. 어디보자, 의전은 다 챙겼고, 식은 사흘 뒤고, 대사는 내 눈앞에 있고, 네 말에 보르디는 평온하다 하였고, 아, 그래."

그녀는 갑자기 자세를 고치자 꽃처럼 펼쳐진 치마가 바스락거렸다. 팔걸이에 팔을 얹고 턱을 괸 그녀는 등을 느슨하게 기댄 채로 나른하게 물었다.

"마르그리트는 지금 어쩌고 있지?"

그는 마르그리트가 누구인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여제의 목소리는 대단히 여상스러워서 한 나라의 황후를 언급한다기보다는 친척 소녀를 부르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번 혼사로 심기 불편해 하는 것만 빼면 안녕합니다."

"길길이 날뛰고 있다는 뜻이로군."

그는 찻잔으로 쓴웃음을 감췄다.

그 말 그대로였다. 황후는 정말이지 극렬하게 혼인을 반대했다. 평소에 조용하게 방에 틀어박혀 수나 놓는 것으로 소일하며 바깥 활동을 자제하는 성품인데다 연회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던 그녀가 정치적 목소리를 내며 황제에게 대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황후가 '그 년의 딸은 절대 내 집에 못 들여!'라고 고함질렀다는 이야기가 시녀를 통해 온 궁정에 파다했다. 그 다음날 황제의 뺨에는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황제는 정원을 산책하다 나뭇가지에 긁혔다며 정원사를 문초하라 괜히 화를 냈지만 다들 그 상처가 황후의 손톱자국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구나. 나도 내가 마르그리트와 사돈을 맺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세르는 좋은 분이십니다."

황후와는 달리, 라는 말이 생략된 문장이었다. 세르 루이 세바스티앙 조제프 자비에, 흔히 세시안이라고 불리는 그는 정말 주워온 자식인 것처럼 황후를 거의 닮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딸의 신랑감에 대해 얘기하는데도 목소리는 명백하게 무관심했다. 마르그리트 황후에 대해 말할 때 깃들어 있던 감정의 절반도 없었다. 하긴, 돈독한 모녀 같지는 않았다. 필리프는 아까 만찬 때 보았던 어린 여대공을 떠올렸다. 여제를 많이 닮아 아주 예쁜 소녀였다. 나이치고 훤칠한 키에 눈이 확 밝아지게 흰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처음에는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식사하는 모습이 대단히 얌전해 보여서 저런 소녀가 제1 계승권자였다니 의아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미셸이 마담 라 세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확 드러난 눈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쨍해서 납득할 수 있었다. 여제가 노숙한 사냥꾼이라면 소녀는 이제 막 깃털이 나기 시작한 어린 독수리였다. 안타깝게도 사로잡혀 새장에 갇힌 신세였지만.

"여대공 전하께서는 잘 사실 겁니다. 제가 보장……, 고모님?"

갑자기 여제가 손을 내저었다. 미간에 주름이 서너 개 잡혔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녀는 주름이 자리잡을까봐 두렵다는 듯 피부를 문질렀다.

"아니, 내가 곤해 그런다. 쉬게 해다오."

"예, 그럼."

그는 여제의 손등에 입 맞추고 아무런 미련 없이 알현실을 떠났다. 복도를 걷는 길에 그는 잠시 기침을 했다. 입을 가렸다가 내린 손에는 쪽지가 한 장 들려있었다. 그의 손에서 쪽지가 화르륵 불타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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