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일반 용병 ' 유비현덕(劉備玄德) ' | |||||
작성자 | 중사3Samoerai | 작성일 | 2015-12-20 09:36 | 조회수 | 2,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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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주의) 대충 컨셉
유비현덕(劉備玄德) 소열황제 일반/특수 ( 속성 : 풀 )
최대 3게이지까지 있음 (걷거나 달리거나 누워있을 때 참)
D-D-D-D-D 기본 공격 검으로 상대를 타격해 무꿇상태로 만든다.(무꿇,방어가능)
D꾹 게이지를 소모해 땅에서 나무를 소환해 상대를 공중으로 뛰운다(방어불능)
D꾹-D-D 긴 넝쿨로 상대를 때린후 내리친다.(약바운딩)
→→ 대쉬
→→-D-D 넝쿨로 상대를 때린뒤 나무로 뛰어 올린다.(방어가능)
→→-D꾹 게이지를 소모해 나무를 소환해 상대를 멀리 날려보낸다.(방어불능)
S 방어 나무를 생성해 자신을 보호한다
S-D-D 반격 상대를 나무로 약경직 시킨뒤 검으로 찌른다.(첫타약경직,두번째타강경직)
A 점프 넝쿨을 발판 삼아 점프한다
A꾹 넝쿨을 길게 늘여 높이 점프한다.
A-D-D-D 점프 공격 상대를 검으로 두번 때린뒤 나무로 내리친다.(바운딩)
A-D꾹 게이지를 소모해 나무로 상대를 강하게 내리친다.
투구 : 열조의 머리띠 갑옷 : 열조의 갑옷 망토 : 열조의 망토
SD [ 장무의 분노 ] (액티브) 검으로 허공을 베어 검기를 5번 날린다.(방어불능,기절)
ASD [ 도원결의 ] (액티브) 장비와 관우를 소환해 상대를 제압한다.(바운딩)
AD [ 지혜 ] (패시브) 이동속도가 증가한다.(+3)
AS [ 용기 ] (액티브) 자신과 주의의 아군의 방어력이 10초간 증가한다.(+2)
10 [ 유년기 ] 황족이라면 황족이지만, 후한은 전한 황실의 자손에게는 황족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승의 아들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으로 유정은 제사에 바칠 금을 한무제에게 적게 올렸다가 파면되었다. 거기다 유비는 유정의 직계가 아닌 방계 후손이었다. 유비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거야.” 라고 말하자 숙부 유자경이 “너는 허튼소리 말거라. 우리 가문을 망치겠구나!” 라고 말했다. 유비는 책 읽는 것은 아주 즐기지는 않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 즉 학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놀고 먹으며 수렵하길 좋아했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지 몇 년되지 않아 탁군으로 되돌아왔고, 돌아온 후 그는 무리들을 모은 뒤 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20 [ 황건적의 난 ] 황건적의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훗날 오호대장군이 되는 관우, 장비와 만나 거병하게 된다.(도원결의) 이후 유자평이라는 사람이 조정으로부터 황건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유비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부른다. 따라서 유비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그에게 종군한다. 또한 유비는 그가 부임하자마자 자신이 파직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독우가 유비를 만나주길 거부하자 유비는 그를 중산국과 탁군의 경계지점까지 끌고 가서 묶은 뒤 매질해 죽이려고 하였는데 독우가 '자기는 단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애원하자 마음을 바꿔 살려주기로 하고 매질만 한 뒤에 인수를 그의 목에 걸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군 경계선을 넘어 달아난다. 하밀승은 그가 버렸고 그 뒤 임명된 고당현위직은 받아들인다. 그 뒤 얼마 안 있다 현령으로 승진하였는데 산적(황건적의 잔당으로 추정)의 침략으로 인해 현령직을 버리고 노식 문하에서 안면이 있었던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참고로 유비는 하진이 파견한 조정 관리 모병에 응한 덕에 독우를 구타한 죄를 사면받기도 했다. 하진은 자신의 모병에 응한 자는 지위 고하와 죄질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준다고 선포했고 유비는 관직을 얻으려고 모병에 응한 게 아니라 독우를 팬 혐의를 씻기 위해 모병에 응했다.
30 [ 공손찬 휘하 ] 공손찬 밑에서 그는 주로 원소와 대결할 때 전선을 맡았었고 거듭된 전공으로 그는 평원령으로 승진한 뒤 얼마 안 있어 평원상이 된다.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하지만 그 자객은 유비를 만나봤는데 유비가 심히 후대하자 유비를 찌를 수 없어 실토하고 달아났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을 땐 원소가 기주목이 되었을 때였는데(공손찬전) 따라서 그는 원소를 최전방에서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조운과 처음 만나지만 당시엔 그냥 면식 관계였다. 유비가 의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구원을 간 것으로 묘사했다. 원술하고 연합하여 대규모 국지전을 벌였다. 유비는 이때 평원 고당현에서 이들 원소-조조 연합군과 싸웠으며 유비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무제기) 유비는 전해와 함께 내려왔다.(선주전) 회군하자 유비는 소패에 그대로 머문다.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던지 그에게 4천 병력을 떼어주고 표를 올려 그를 예주자사로 삼는다.(선주전)
40 [ 서주에서 ] 도겸은 그 해에 죽었는데(194년) 이때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전에 유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북해상 공융은 유비를 지지했다. 유비는 그로 인해 서주의 주인이 되어 2년간 다스린다. 원술과 싸우러 간다. 그러나 후방에 남겨진 장비가 배반한 여포에게 패하자 유비는 서주로 되돌아가 여포와 일단 화목하였고, 유비군은 과거 자신들이 여포에게 호의로 내주었던 소패에 머무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를 거부하고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고 패성에 머물게 한다.(무제기) 양봉과 한섬을 살해한다. 이때 유비는 양봉과 면담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그를 잡아 죽였고 한섬은 양봉을 잃자 병주로 달아나다 장선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된다.(동탁전)
50 [ 방랑 군주 ] 198년 유비군이 여포군의 군마를 약탈했다는 이유로 여포가 장료와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한다.(선주전) 이에 유비는 격파되고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다. 조조는 이 사태에 직접 출병하여 여포를 공격하고 유비는 조조군과 함께 종군하여 하비성을 공격한다. 여포는 격파되었고 유비는 처자를 되찾는다. 그 뒤 조조와 함께 허창으로 되돌아온다. 조조는 표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예우를 매우 두텁게 하였는데 심지어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요구하는 임무를 주기도 하였다.(장패전) 그러던 중 유비는 헌제를 만나 그의 밀명을 받들게 되고 이에 몰래 동승,왕자복,충칩,오자란 등과 조조를 죽일 것을 공모하게 된다. 또한 사냥터에서 조조가 자신의 지지자를 알아보기 위하여 헌제의 활을 사용하는 무례를 범하자 관우가 조조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을 유비가 말리기도 한다.(관우전) 그것은 적벽대전과 더불어 조조의 일생일대 최악, 최흉의 실책이 되었다.(정욱전) 유비가 도착하기 전에 원술은 죽어 있었고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하여 죽이고 서주를 되찾는다. 유비가 도착하자 바로 서주의 군현 대다수가 배신하고 유비에게 붙었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와 동맹을 맺었고 원소는 유비에게 기병을 보내주었다.(원소전)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으나유비는 이들을 격파한다. 여동생이었던 헌제의 후궁인 동귀비(당시 회태 5개월이었다고 한다)를 교살한 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조조의 대장기만 보고 달아났다고 한다.(선주전)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며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 그러나 조인이 이끄는 기병에게 패배하고(조인전) 유비는 원소에게로 되돌아간다.(선주전) 이번엔 공도와 함께 연합하여 수천의 병력을 구성한다. 조조는 채양을 보내 공격하나 전사하자 조조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패해 유표에게로 달아난다.
50 [ 유표 휘하로 가다 ] 유표에게로 달아난 후 유표는 유비를 조조 세력과의 최전선에 위치한 신야에 주둔하게 하였고 여기서 유비는 제갈량을 얻게 된다.(삼초고려) 이때 조조는 유비가 유표와 함께 배후를 칠까 매우 염려하였는데 곽가는 유비를 쓴다면 유표가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고 그를 안 쓰면 쓸모없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안심시킨다.(곽가전) 이때 부손이 유비를 언급하며 설득한 과정이 볼만하다.(유표전) 그러자 부손은 조조를 유비보고 막으라고 해도 힘든데 유종이 감당할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만일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면 형주는 유종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대화를 통해 유표의 신하들이 유비에게 가진 경계심을 엿볼 수 있다. 이르렀을 때까지도 유비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비는 나중에야 유종이 항복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따라서 사람을 유종에게 보내 소문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유종은 항복한 사실을 송충을 통해 전했고 유비는 이런 소식에 크게 놀랐고 격분했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이미 코앞에 있고 조조에 항복한 형주와 조조 본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유비군은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분노하여 송충을 겨누며 '널 죽여야 마땅하나 널 죽이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외치며 부하들과 작전을 논의한다. 이들은 남쪽으로 가 형주의 관원들과 군사를 사로잡아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자신을 받아주었던 유표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다하여 거절한다. 기병 5천을 뽑아 호표기라 하여 하루만에 300리(한나라 시대 1리 = 415.8m 따라서 125km에 해당)를 달려 장판파까지 추격해 이르렀다. 이 때 자발적으로 유비를 따라가는 백성들이 10만 명에 이르렀는데 신하들이 버리고 도망가자 하였으나 유비는 이들을 딱하게 여겨 버리고 행군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이 기병의 추격이 이르자 유비는 자신의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호표기의 대장인 조순은 이런 과정에서 유비의 두 딸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는 강릉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조인전) 하구에 도착한다. - 중략 -
60 [ 형주의 주인이 되다 ] 이 후 조조군과 싸워 유비는 남군과 형남4군을 얻는다. 이를 좌절시킨다.
70 [ 유비의 입촉 ] 211년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합병하자고 간언한다. 유장은 이를 옳게 생각하고 장송을 유비에게 사신으로 보낸다. 그런데 앞서 부손은 유종에게 유비는 유종이 부하로 다룰만한 자가 아니며 조조를 막아내면 형주는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간언한 적이 있다. 유비가 익주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군사를 늘려주었고 그 결과 그 병사는 3만이 되었다고 한다. 유비는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선주전) 212년에 장송(자교)의 내통혐의가 발각되어 장송이 참수당하자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13년엔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유비의 군사(軍師) 봉추(鳳雛) 방통(龐統)이 낙성 공격을 지휘하다 유시 (어지러이 날아오는 화살, 눈 먼 화살)에 맞아 유비군 진중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유비는 낙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나서 성도를 포위할 무렵에 유비의 부수관 탈취와 동시에 형주에서 출병하여 익주 각지를 평정 중이었던 제갈량,장비,조운 등이 유비 본군(3만)과 합류한다. 214년엔 오호대장군(관장마황조)의 세 번째 장수인 서량의 마초가 서촉으로 도망 와 유비군에 합류하였고 뒤이어 유장이 항복하게 된다. 친척관계인 자건 간에 인재를 기용했으며 대체로 유장에게 소외된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혹여 반대파의 구심점이 될 지모를 유장은 한지로 보내버린다. "이전에 유비가 성도로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많이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비하였다."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진군전) 이 때문인지 조조가 한중으로 진군해올 무렵까지 '하루 수십 번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80 [ 익양대치 ] 같은 214년 헌제의 아내이자 황실의 황후였던 복황후가 조조에 의해 살해당했다. 조조가 212년 마침내 위공이 되어 황제인 헌제를 끌어내리고 마음대로 국상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복황후와 그녀의 외척세력 조조를 제거하여 황권을 다시 회복하려 하였고, 이에 조조는 화흠을 보내 복황후를 죽이고 복황후 소생의 두 황자도 독살하였다. 외척들과 황제쪽에 붙어있던 인사 200여명을 죽인 후 조조는 자신의 딸 헌목황후를 헌제에게 보내 황후로 삼게 했다. 동귀비 이후 또 다시 벌어진 이러한 사태에 유비는 큰 분노를 내보였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전부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오주전) 보인다.(선주전) 그런데 215년 그해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촉과 오는 위나라의 확장에 크게 긴장하게 된다. 이에 손유 양측은 다시 만나 합의를 거쳐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 후 조약을 맺고 일을 매듭짓는다. 즉 이 시점에서 형주 문제는 일단 락 된 것으로 보인다.
90 [ 한중 공방전 ] 유비 생애 최고의 리즈시절 (무제기) 219년엔 유비군이 전투에서 대승해 위의 장군 묘재 하후연이 (황충 또는 유비에 의해) 참수된다. 이에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지형을 기반해 맞서 조조에게서 한중을 수비한다. 그리고 헌제를 협박해 위왕의 위를 받고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한 조조에 맞서 한중왕(漢中王)을 칭하니 마침내 유비는 천하삼분을 완료한다.
100 [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 하지만 219년 관우가 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서황에게 패배하고, 이후 위와 밀약을 맺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침공한 손권의 오나라군에게 형주를 잃고 본인은 참수당하는 일이 생긴다. 관우의 죽음에 슬퍼하며 복수를 준비하던 장비 역시 부하인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한다. 유비는 크게 놀라 격분하며 울었다.(도원종언) 220년엔 조조의 아들 조비가 마침내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위나라의 황제를 칭하게되고 유비는 조비에 대항하여 221년에 한나라 황제를 칭하게 된다. 그리고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선포하였으며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