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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三國志가알려주는 삼국지 정사 이야기7 서황 공명
작성자 대령1三國志 작성일 2015-06-18 22:20 조회수 548




서황(徐晃)의 자(字)는 공명(公明)이고 하동(河東)군 양(楊)현 사람이다. 군리(郡吏)가 되어 거기장군(車騎將軍) 양봉(楊奉)을 따라 도적을 토벌해 공을 세웠고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이각(李?), 곽사(郭?)가 장안(長安)에서 난을 일으키자 서황은 양봉을 설득해 천자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도록 했는데 양봉이 이 계책을 따랐다. 천자가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하동군 안읍현)에 이르렀고 서황을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낙양에 도착하자 한섬(韓暹), 동승(董承)이 날마다 쟁투(爭鬪)했다. 서황이 양봉을 설득해 태조(太祖-조조)에 귀부하라 했는데 양봉이 이를 *으려 하다 후회(後悔)했다. 태조가 양(梁-예주 양국)에서 양봉을 토벌하자 서황은 마침내 태조에 귀부했다.
태조가 서황에게 군사를 주어 권(卷 -하남군 권현)(卷의 발음은 墟+權)과 원무(原武-하남군 원무현)의 적(賊)을 공격하게 해 서황이 그들을 격파하고 비장군(裨將軍)에 임명되었다. 태조를 수행해 여포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군을 이끌고 여포의 장수 조서(趙庶), 이추(李鄒) 등을 항복시켰다. 사환(史渙)과 함께 하내(河內)에서 휴고(?固)를 참수했다. 태조를 수행해 유비를 격파했다.
또한 태조를 수행해 안량(顔良)을 격파하고 백마(白馬-연주 동군 백마현)를 공략한 후 진격하여 연진(延津-황하 나루터. 진류 산조현 북쪽)에 이르러 문추를 격파(文醜)했다.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다. 조홍과 함께 은강적(?彊賊-?彊은 예주 여남군 은강현) 축비(祝臂)를 공격해 깨뜨렸다. 또한 사환과 함께 고시(故市-하남군 고시현)에서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를 공격했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태조가 업(?) 을 포위한 뒤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격파하자 역양령(易陽令-기주 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韓範)이 거짓으로 성을 들어 항복했다가 다시 맞서서 지켰다. 태조가 서황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다. 서황이 도착하자 화살을 성 안으로 날려 성패(成敗-성공과 실패)에 관해 진술했다. 한범이 후회하며 서황에게 곧바로 항복했다.
그 뒤 태조에게 말했다,

“원씨 두 명(원담과 원상)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고 아직 떨어뜨리지 못한 여러 성들은 귀를 기울이며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역양(易陽)을 멸한다면 내일이면 (다른 성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이니 하북(河北)을 적시에 평정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역양을 (멸하지 않고) 항복시켜 다른 여러 성들에 보이신다면 모두 공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태조가 이를 옳다고 여겼다.
별도로 모성(毛城)을 쳤는데, 복병을 두고 엄격(掩擊-기습. 엄습)하여 3둔(屯)을 격파했다. 태조를 수행해 남피(南皮)의 원담을 격파하고 평원(平原)의 반적(叛賊)들을 쳐서 무찔렀다. 태조를 수행해 답돈(?頓)을 정벌하고 횡야장군(橫野將軍)에 임명되었다.
태조를 수행해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번(樊)에 주둔하여 중려(中廬-형주 남군 중려현), 임저(臨沮-남군 임저현), 의성(宜城-남군 의성현)의 적(賊)을 토벌했다. 또한 만총(滿寵)과 함께 한진(漢津)에서 관우(關羽)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江陵)에서 주유(周瑜)를 쳤다.
건안 15년(210년), 태원(太原)에서 모반한 자를 쳤다. 대릉(大陵-병주 태원군 대릉현)을 포위해 함락시키고 적의 우두머리(賊帥) 상요(商曜)를 참수했다.
한수, 마초 등이 관우(關右=관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211년의 일) 서황을 보내 분음(汾陰-하동군 분음현)에 주둔시켜 하동(河東)을 달래었는데, 소와 술을 내려 선인(先人-선조)의 묘에 올리도록 했다.
태조가 동관(潼關)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공의 군세가 이처럼 흥성한데도 적이 따로 포판(蒲阪)을 수비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모(無謀-꾀나 분별이 없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신(臣)에게 (주1) 정병(精兵)을 내려 포판진(蒲阪津)을 건너게 해 주십시오.

(주1) 신 송지가 말한다 ? 이때 서황이 아직 신(臣)이라 칭하진 않았을 것이므로 전사(傳寫-베껴서 전함)한 자의 오류이다. (※당시에 조조가 왕이나 황제가 아니었으니 서황이 조조에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신(臣)이라 했을 리가 없으므로, 이는 진수 삼국지가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는 말)

군의 선봉이 되어 그 내부를 끊는다면 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가 말하길,

“옳은 말이오.”

라 하고는, 서황에게 보기 4천 명을 주어 (포판)진을 건너게 했다.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적(賊) 양흥(梁興)이 밤중에 보기 5천 여 명을 이끌고 서황을 공격했으나 서황이 이를 격퇴했다. 태조군이 강을 건너 마침내 마초 등을 격파했다. 서황을 하후연과 함께 보내 유미(??-우부풍 유미현), 견(?-우부풍 견현)의 여러 저(?)족을 평정케 했고, 태조와 안정(安定)에서 회합했다.

태조는 업(?)으로 돌아가면서 서황을 하후연과 함께 보내 부(?-좌풍익 부현), 하양(夏陽-좌풍익 하양군)의 남은 적들을 평정하게 해, 양흥(梁興)을 참수하고 3천 여 호를 항복시켰다.
태조를 수행해 장로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서황을 보내 독(?), 구이(仇夷)의 여러 산저(山?)들을 공격케 해 모두 항복시켰다. 평구장군(平寇將軍)으로 올렸다. 장군 장순(張順)의 포위를 풀어 주었고 적(賊) 진복(陳福) 등의 30 여 둔(屯)을 들이쳐 모두 깨뜨렸다.
태조가 업(?) 으로 돌아올 때 서황을 하후연과 함께 남겨 양평(陽平)에서 유비를 막도록 했다. 유비가 진식(陳式) 등 10여 영(營)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끊자 서황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이를 쳐서 깨뜨렸는데, 적은 스스로 산과 계곡에 투신해 죽은 자가 많았다.
태조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서황에게 절을 내렸고(假節)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이 각도(閣道-잔도)는 한중의 험요한 인후(咽喉-목구멍, 요지)요. 이에 유비가 안팎을 단절하여 한중을 취하고자 했으나 장군이 일거에 적의 계책을 꺾어버렸으니 심히 좋은 일이오.”

그리고 태조가 친히 양평(陽平)에 이르렀고 (그 뒤) 한중의 제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다시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 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襄陽)에서 장군 여상(呂常)을 포위했다.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졸(新卒-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陽陵陂)로 나아가 주둔했다. 태조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와 장군 서상(徐商), 여건(呂建) 등을 서황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병마(兵馬)가 집결하기를 기다려 함께 전진하라.”
적은 언성(偃城-번성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궤도(詭道-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偃城)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공격하기 전에 태조가 그 앞뒤로 은서(殷署), 주개(朱蓋) 등 모두 12영(營)을 서황에게 보냈다.
적은 위두(圍頭)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四塚)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양성(揚聲-널리 소문을 퍼뜨림)하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태조가 영을 내렸다,

“적이 참호와 녹각(鹿角)을 10중으로 에워쌌으나 장군이 싸워 모두 이겨 마침내 적의 포위를 함몰시키고 다수를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내가 30여 년간 용병해왔고 또 옛적에 용병을 잘하는 자들에 관해 들어보았으나, 장구(長驅-멀리 말을 몰아 달려감)하여 곧바로 적의 포위망에 돌입한 자는 일찍이 없었다. 게다가 번, 양양이 포위당한 일은 거(?), 즉묵(卽墨) 때 보다 더 극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孫武-손자)나 양저(穰??사마양저)를 뛰어넘는다.”
(※ 거, 즉묵이 포위당한 것은 전국시대 연소왕 때 악의가 제나라를 침공했을 때를 말하는 것)
서황은 진려(振旅-군을 거두어 개선함)하며 마피(摩陂-영천군 겹현의 동남쪽)로 돌아왔다. 태조가 7리 밖에서 서황을 맞이해 술을 마련해 큰 연회를 베풀었다. 태조가 술잔을 들어 서황에게 권하고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말했다,

“번, 양양을 보전한 것은 모두 장군의 공이오.”
이때 제군이 모두 집결하여 태조가 제영(諸營)들을 순시했는데, 사졸들은 모두 군진을 이탈해 (태조를) 보려 했으나 서황의 군영은 정제(整齊-가지런히 정돈함)하여 장사(將士-장졸)들은 진(陳)에 머물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태조가 감탄하며 말했다,

“서(徐)장군은 가히 주아부(周亞夫)의 기풍을 갖추었다 할 만하오.”
(※ 주아부(周亞夫)-전한 초 명장으로, 경제 때 제후국들의 반란사건인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평정)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자 서황을 우장군(右將軍)으로 임명하고 녹향후(?鄕侯)로 올려 봉했다. 제위에 오르자 양후(楊侯)로 올려 봉했다. 하후상(夏侯尙)과 함께 상용(上庸-익주 한중군 상용현)에서 유비를 쳐서 격파했다. 양평(陽平)을 진수하게 하고 양평후(陽平侯)로 옮겨 봉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오나라 장수 제갈근(諸葛瑾)과 양양에서 맞섰다. 식읍을 200호 늘려 예전과 합쳐 모두 3,100호가 되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유언을 남겨 (자신이 죽은 후) 평상복으로 염(斂)하라 했다.
서황은 성정이 검약(儉 約-검소하게 절약함)하고 외신(畏愼-삼가고 신중함)하여 군을 이끌 때는 늘 멀리까지 척후(斥候-정찰)했다. 우선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되면 뒤에 싸우고 (싸움에 이겨) 추격할 때는 이익을 다투어 사졸들은 밥 먹을 틈도 없었다. 서황은 늘 탄식하며 말하길,

“옛 사람들은 명군(明君)을 만나지 못한 것을 근심했으나 오늘 나는 다행으로 명군을 만났으니, 늘 공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뿐 어찌 사사로운 명예를 *겠는가!”

라 하며, 끝내 교원(交援-교우를 맺어 붕당을 만듦)을 넓히지 않았다.
태화 원년(227년)에 죽으니, 시호를 내려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서개(徐蓋)가 후사를 이었다. 서개가 죽자 아들 서패(徐覇)가 후사를 이었다. 명제는 서황의 봉호를 나누어 서황의 자손(子孫-아들과 손자) 20 명을 열후에 봉했다.
[[주령전]]으로 분할

평한다. (권17 장악우장서 전 말미의 평으로, 다섯 장수 모두에 관한 진수의 총평) 태조가 무공(武功)을 세울 때 양장(良將-좋은 장수)으로는 이 다섯 명이 으뜸이었다. 우금이 가장 의중(毅重-굳세고 엄중함)하다고 일컬어졌으나 죽을 때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장합은 교변(巧變-교묘하게 변화에 대처함)하다 칭해졌고 악진은 효과(驍果-용맹과 과단성)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러나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전해들은 바와 서로 부합하지 않거나 혹은 주기(注記)가 유실되어 장료, 서황처럼 상세히 갖추어지지 못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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