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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三國志가알려주는 삼국지 정사 이야기6 왕기 백여
작성자 대령1三國志 작성일 2015-06-17 21:17 조회수 568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Nr1rT




왕기(王基)는 자가 백여(伯輿)이고, 동래군(東萊) 곡성현(曲城)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왕옹(翁)은 그를 기르는데 깊은 정성을 다했으며, 왕기 또한 효자라는 칭찬을 들었다. 17세 때, 왕기는 군의 부름으로 관리가 되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낭야군(琅邪) 경내로 들어가 유학하였다.

황초(黃初) 연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고 낭중(?中)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청주(?)가 막 평정되었는데, 자사(刺史) 왕릉(王?)이 특별히 상주하여 왕기를 별가(別駕)로 임명할 것을 요청하였다. 후에 중앙으로 불려가 비서랑(?書?)으로 임명되었지만, 왕릉은 또 그를 돌아가 일을 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오래지 않아 사도 왕랑이 왕기를 초빙했지만, 왕릉은 그를 보내지 않았다. 왕랑은 편지를 써서 주(州)를 탄핵하며 말했다.

“무릇 가신(家臣) 중 우수한 인재는 삼공(公輔)을 보좌하도록 승진시키고, 삼공의 신하 중 우수한 자는 조정으로 들어와 국왕(王)을 보좌하는 직책을 담당해야만 합니다. 때문에 고대의 후(侯)와 백(伯)들은 선비를 바치는 예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주에 숙위(宿衛)를 담당할 만한 신하를 비각(?閣)의 관리로 남겨두는 것은 거의 듣지 못한 일입니다.

왕릉은 여전히 그를 보내지 않았다. 왕릉에 대한 칭찬의 소리가 청주(?) 땅에 흘렀는데, 사실은 왕기의 협력과 보좌의 결과이다. 대장군(大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왕기(基)를 초청하였다. 왕기가 도착하기 전에 중서시랑(中書侍?)으로 발탁되었다.

명제(明帝)가 성대한 궁전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피폐하게 되었을 때, 왕기가 상주문을 올렸다.

- 신이 듣기에는 고대 사람들은 물로써 백성들을 비유하여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동시에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의 위에 있는 자는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백성이 안락하면 안이한 기대를 품고, 고통스러우면 혼란을 생각하게 됩니다. 때문에 선대의 군왕은 절제되고 검소한 생활을 보내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과거 안연(?淵)은, 동야자(東野子)의 말 부리는 방법은 말의 힘이 다하였는데도 전진하기를 구함이 그치지 않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장차 실패할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노역은 수고롭고 고통스러우며 남자와 여자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동야자의 실패를 깊이 살피시고 배와 물의 관계의 비유를 염두에 두어 힘을 전부 사용하지 않았을 때 잠시 쉬도록 하고, 백성들이 고통을 받기 전에 힘을 아끼고 노역을 줄이십시오. 과거 한(漢)나라가 천하를 지배하고, 효문제(孝文時) 때에 이르러서는 오직 같은 성의 제후(諸侯)만을 있게 하자, 가의(賈誼)는 이것을 걱정하여 말하기를, ‘불을 붙여 놓은 섶나무 더미를 아래에 놓고 자신은 그 위에서 자면서 그것이 안전하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외적(賊)은 아직 멸망되지 않았고, 용맹한 장수가 병사들을 인솔하고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면 적의 병력에 응할 수 없고, 이와 같은 것이 오래되면 후대 자손들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지금 흥성한 시대에 근심을 제거하는 일에 전력하지 않아 만일 자손들이 계속 이어질 수 없다면 이것은 사직(社稷)의 걱정거리입니다. 만일 가의(賈誼)로 하여금 또 말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과거보다 엄하게 지탄할 것입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수(王肅)는 각 경전들의 해석을 쓰고, 또 조정의 예의에 대해 논하고 확정되어 정현(鄭玄)의 본의를 지지하며 항상 그에게 대항했다. 왕기는 안평태수(安平太守)로 승진하였지만, 공적인 사건으로 관직을 떠났다. 대장군(大將軍) 조상(曹爽)이 요청하여 종사중랑(從事中?)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 안풍태수(安?太守)가 되었다. 군(郡)은 오(吳)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부명하게 방비책을 설치하였으므로 적들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토구장군(討寇將軍)의 호를 더하였다.

오(吳)는 일찍이 대대적으로 병력을 징발하여 건업(建業)에 집결하고, 양주(揚州)를 쳐들어가 공격하려 한다고 선포했다. 자사(刺史) 제갈탄(諸葛誕)은 왕기(基)에게 사태를 예측해 보도록 했다. 왕기가 말했다.

“과거 손권(孫權)은 합비(合肥)에 두 차례 갔고, 강하(江夏)에 한 번 갔었습니다. 그런 연후에 전종(全琮)이 여강(廬江)으로 출격하고, 주연(朱然)이 양양(襄陽)을 침범했는데, 모두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육손(陸遜)등은 이미 죽었고, 손권은 연로하여 국내에는 현명한 후사가 없고, 조정에는 계책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손권이 직접 출격하면 국내의 모순이 갑자기 폭발하게 될까 두렵고 위험한 종기가 발작하게 될까 걱정이 되며, 장군을 파견하려고 하지만 옛날 장수들은 이미 죽고 새로운 장수들은 아직 신뢰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의 지파가 되는 당을 보충하여 안정시켜 돌아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후에 손권은 결국 출병할 수 없었다. 당시 조상(曹爽)이 권력을 장악하자 교화가 쇠미해졌으므로 왕기는 시요론(時要論)을 지어 현대 상황을 엄하게 지탄했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불려 돌아왔다. 평민에서 기용되어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되었지만, 관직을 받기도 전에 조상이 처형되었다. 왕기는 일찍이 조상 휘하의 관리로 있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면직되었다.

그 해에 왕기는 상서(?書)로 임명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으며, 양열장군(揚烈將軍)의 호를 더하였고, 정남장군(征南) 왕창(王昶)을 수행하여 오나라를 공격했다. 왕기는 별도로 이릉(夷陵)에 있는 보협(步協)을 습격했는데, 보협은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왕기는 공격 체재를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실제로 병사를 나누어 웅부(雄父)의 저각(邸閣 : 식량 저장소)을 탈취하여 쌀 30여 만 석을 몰수하였으며, 안북장군(安北將軍) 담정(譚正)을 포로로 잡고 수천 명의 항복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항복한 백성들을 이주시켜 이릉현(夷陵縣)을 설치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했다. 왕기는 또 상주하여 왕창에게 성을 쌓고 관소를 강하(江夏)로 옮겨 하구(夏口)에 가깝도록 건의하여 적군이 감히 가볍게 장강(江)을 넘지 못하도록 하자고 했다. 그는 제도를 명확히 하고, 군대와 농업을 정리하고, 겸하여 학교를 세웠으므로 남방에서는 그를 칭찬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오나라를 토벌하려고 상의하였는데, 왕기에게 조서를 내려 진격하는 것이 적당한지 어떤지 의견을 서술하도록 했다. 왕기가 대답했다.

“무릇 병사를 움직였지만 공이 없으면, 밖으로는 위엄과 명성이 꺾이고, 안으로는 경제가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반드시 만전을 기한 연후에 출동을 해야 합니다. 만일 수로 교통에 의지하지 않고 식량을 모으고 수전할 준비를 한다면, 비록 장강 안쪽에 병사를 집결시켰을지라도 절대로 물을 건널 수 있는 형세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강릉(江陵)에는 저(沮)ㆍ장(?) 두 물이 있고, 관개된 비옥한 토지가 수천 곳이 있습니다. 안육(安陸)의 변방에는 연못과 옥토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수군과 육군 양군이 나란히 농사를 지어 군대의 자재와 식량을 충실하게 하고, 그런 연후에 다시 강릉(江陵)과 이릉(夷陵)으로 향하여 병사를 나누어 하구(夏口)를 점거하고, 저수(順沮)와 장수(?)를 통하여 수로를 이용해 곡물을 싣도록 하십시오. 적군이 관군에게 장기간의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면, 천자의 주살을 거역한 자의 뜻은 꺾이게 될 것이고, 왕도(王者)와 교화를 흠모하는 자의 마음은 더욱더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만이(蠻夷)를 합쳐 통솔하여 그 내부를 공격하고 정예병사가 밖서 토벌하도록 한다면 하구(夏口)로부터 상류지역은 틀림없이 함락될 것이고, 장강 밖에 있는 군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오와 촉(吳蜀)의 연합은 끊어질 것이고, 연합이 끊어지면 오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사를 출동시킨 이로움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마경왕(司馬景王 : 사마사)이 정치를 총괄하게 되었다. 왕기는 편지를 써서 그에게 경계의 말을 서술했다.

- 천하는 매우 광대하고 여러 가지 사물은 매우 뒤섞여 있습니다. 실제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앉아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무릇 뜻이 바르면 여러 가지 사악함은 발생하지 않고, 마음이 조용하면 여러 가지 일은 혼란스럽지 않으며, 충분히 생각한 연후에 결정하면 명령은 지나치게 번다하지 않을 것이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신뢰하고 사용하면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화해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때문에 먼 곳을 알고 화평하게 하는 것은 내 몸에 있는 것이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은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허윤(許允)ㆍ부하(傅?)ㆍ원간(袁侃)ㆍ최찬(崔贊)은 모두 한 시대의 정직한 선비들로 기질은 있지만 떠도는 마음은 없습니다. 정치에 협력하도록 할 만한 인물들입니다.

사마경왕(景王)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고귀향공(高貴?公)이 제위에 오른 후, 왕기를 승진시켜 상락정후(常樂亭侯)로 봉했다. 관구검(?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기를 행감군(行監軍)ㆍ가절(假節)로 임명하고 허창(許昌)의 군대를 통솔하도록 했다. 그는 허창으로 가서 사마경왕(景王)과 만났다. 사마경와이 말했다.

“그대의 예측으로 관구검 등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 같소?”

왕기가 대답했다.

“회남(淮南)의 반역은 관리와 백성들이 난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관구검 등이 사람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눈앞에서 처형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무리를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대군(大兵)이 임한다면, 반드시 그 땅은 붕괴되고 와해될 것이고, 관구검(儉)과 문흠(欽)의 머리는 조회가 끝나지 않아서 군문(軍門)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사마경왕(景王)이 말했다.

“옳소.”

왕기(基)에게 명하여 대군의 선봉이 되도록 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관구검과 문흠은 사납고 교활하므로 직접 싸우는 것은 곤란하도록 했다. 왕기에게 조서를 내려 진군을 멈추도록 했다. 왕기의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관구검 등이 전군을 이끌고 내지로 깊숙이 침입하여 공격할 수 있는데도 오랜 기간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간사함과 허위가 이미 드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군의 위엄과 무예를 과시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고 진군을 멈추고 높은 보루를 쌓아 마치 두려워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병사를 사용하는 형세가 아닙니다. 만일 침략당한 백성이나 또는 주(州)와 군(郡)의 병사들이나 가족이 적병의 포로가 된다면 다시 흩어지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 관구검 등에게 협박을 받은 자는 자신의 지의 무거움을 생각하고 감히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병사를 사용할 수 없는 땅에 멈추게 하여 사악한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나라가 이 기회를 빼앗는다면, 회남(淮南)은 우리나라 소유의 영토가 되지 않을 것이고, 초(?)ㆍ패(沛)ㆍ여(汝)ㆍ예(豫)는 위험하여 안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계책상의 큰 실패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신속히 나아가 남돈(南頓)을 근거지로 해야만 합니다. 남돈에는 큰 저각(邸閣)이 있는데, 계산해 보면 군사들이 40일간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견고한 성을 갖고 저장된 곡물을 이용하여 선수를 쳐서 적의 전의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을 평정하는 중용한 수단입니다.”

왕기가 여러 차례 정하였으므로 곧 나아가 은수(?水)를 점거할 것을 허락했다. 도착한 후에 또 진언했다.

“전쟁에는 졸속(拙速)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공교롭게 하고 더디게 오래한다는 것은 ** 못했습니다. 현재 밖으로는 강적이 있고, 안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신하가 있습니다. 만일 당시에 결정하지 못한다면, 사태의 깊고 얕음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장군(將軍)이 신중함을 지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신중함을 지키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도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견고한 성을 근거로 하고 보루를 지켜 국가가 축적한 식량은 적의 식량이 되는 한편, 우리 군사들은 먼 곳에서 식량을 운송하니, 크나큰 실책인 것입니다.”

사마경왕(景王)은 군사들의 집결 도착을 기다린 후에 결정하려고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왕기가 말했다.

“장군은 군대 안에 있으므로 당신의 명령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적이 얻으면 이익이 되고, 우리가 얻어도 이익이 되는 땅, 이것은 성을 빼앗는다는 말로 남돈이 바로 이와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곧장 진군하여 남돈(南頓)을 점거했다. 관구검 등도 항(項)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시 남돈으로 가서 다투려고 했지만, 출발하여 10여 리 되는 곳에서 왕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항으로 돌아와 지켰다. 당시 연주자사(?州刺史) 등애(鄧艾)가 악가(樂嘉)에 주둔하고 있었다. 관구검은 문흠에게 병사를 지휘하여 등애를 습격하도록 했다. 왕기는 그 세력이 둘로 나뉘어졌음을 알고 진군하여 항으로 갔으므로, 관구검의 군대는 곧 패하였다. 문흠 등이 이미 평정된 후, 진남장군(?南將軍)ㆍ도독예주군사(都督豫州諸軍事)로 승진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임하였으며, 안락향후(安樂?侯)로 승진되어 봉해졌다. 상주하여 2백 호를 분할하여 숙부의 아들 왕교(喬)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주어 숙부가 양육시켜준 은덕에 보답할 것을 요청했다. 조서를 내려 특별히 허락했다.

제갈탄이 반역을 하자, 왕기는 자기의 관직으로 진동장군(?東將軍)ㆍ도독양예제군사(都督揚豫諸軍事)를 대행했다. 당시 대군이 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군의 병사가 정예였으므로 왕기에게 군대를 집중시켜 보루를 굳게 지키도록 조서를 내렸다. 왕기는 여러 번 나아가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 오나라에서는 주이(朱異)를 제갈탄의 구원병으로 파견하여 안성(安城)에 주둔시켰다. 왕기는 또 군사들을 인솔하여 전진하여 북산(北山)을 점거하라는 조서를 받았다. 왕기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의 포위진과 보루는 점점 더 견고해지고 병마가 집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심으로 수비하여 적군이 달아날 때를 기다렸다가 소멸시키고, 다시 병사들을 이동시켜 요충지를 지켜 적군으로 하여금 달아나게 합시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록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곧 편의대로 지키고 상소를 올렸다.

- 지금 적군과 대적하고 있으니 당연히 산처럼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동하여 험난한 곳에 의지한다면 인심은 동요하고 전략상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군사들이 깊은 참호와 높은 누대를 점거하고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안정되고 동요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병사를 다루는 요점입니다.

상소가 올려지자, 허락한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대장군(大將軍) 사마문왕(司馬文王)은 진군하여 구두(丘頭)에 주둔하고, 부대를 나누어 포위하였으므로 각 장수들은 각기 자기의 통괄지역이 있게 되었다. 왕기는 성 동쪽과 성 남쪽 두 군대를 지휘하였다. 사마문왕(文王)은 군리(軍吏)에게 명하여 진남장군(?南)이 지휘하는 경계로 들어갈 때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적군의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졌고, 밤낮으로 포위된 진영을 공격하였지만, 왕기는 그때마다 맞아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시켰다. 수춘(壽春)이 함락된 후, 사마문왕(文王)은 왕기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 당초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군대의 이동을 요청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했소. 당시 아직 긴급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나 또한 적당하다고 했소. 당시 아직 긴급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나 또한 적당하다고 했소. 장군은 이해관계를 깊이 계산하고 독자적으로 견고한 뜻을 견지하며 위로는 황제의 조서로 내린 명령을 위반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건의를 거절하였지만 끝내는 적군을 제압하고 적군은 멸망시켰소. 비록 옛 사람의 서술 속에 유사한 공신이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음을 넘지는 못할 것이오.

사마문왕은 장수들을 파견하여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인솔하여 깊이 침입하여 당자(唐咨) 등의 자제를 불러 영접하도록 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오나라를 전복하는 형세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왕기가 간언하여 말했다.

“옛날 제갈각(諸葛恪)은 동관(東關)의 승리에 편승하여 장강 이남의 병사를 다하고 수춘의 신성(新城)을 포위하였는데, 성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강유(姜維)는 조수(?) 근처에서의 승리를 틈타 가볍게 무장한 병사를 인솔하여 깊숙이 침입하였지만, 식량이 계속 지원되지 못하였으므로 군대는 상규(上?)에서 좌절되었습니다. 무릇 크게 승리를 한 후에는 아래 위에서 모두 적군을 경시합니다. 적군을 경시하면 곤란한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적군은 방금 밖에서 패하였고, 또 내부적인 걱정이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수비를 바르게 하고 국사를 생각할 때입니다. 게다가 병사들은 1년이 넘게 출정하였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포로가 되거나 죽은 적군의 수는 10만 명이고, 죄인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역대의 정벌할 때부터 이와 같이 자기 군대를 보존하고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이미 많다고 생각하고 다시 적군을 추격하여 달려가지 않고 자신의 위풍이 꺾일까 두려워했습니다.”

사마문왕은 비로소 진군하는 것을 멈추었다. 회남(淮南)이 막 평정되자, 왕기를 정동장군(征東將軍)ㆍ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로 전임시키고, 승진시켜 동무후(東武侯)로 봉했다. 왕기는 상소를 올려 완곡하게 사양하고, 공적을 보좌관들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장사(長史)ㆍ사마(司馬) 등 일곱 명이 모두 제후(侯)가 되었다.

이 해, 왕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조서를 내려 그 흉보(凶)를 비밀로 하고, 왕기의 부친 왕표(豹)의 유해를 맞아 낙양(洛陽)에 합장시키고, 왕표에게 북해태수(北海太守)를 추증했다.

감로(甘露) 4년(259), 정남장군(征南將軍)ㆍ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로 전임시켰다. 상도향공(常道?公)의 제위에 오르자 식읍을 천 호 증가시켜 이전 것과 합쳐 5천 7백 호가 되었다. 앞뒤로 아들 두 명이 정후(亭侯)와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졌다.

경원(景元) 2년(261), 양양태수(襄陽太守)가 상소를 올려 오나라의 등유(鄧由) 등이 귀순하려 한다고 했다. 왕기는 조서를 받았지만, 응당 이 기회를 빌려 장강 이남 지역을 공격하여 오나라를 동요시켜야 한다고 했다. 왕기는 그들이 귀순하려는 것이 거짓이라고 의문을 품고 역마를 달려 상황을 진술했다.

- 가평(嘉平) 이래 내란은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현재 급히 힘써야 할 것은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안정되게 하는 일이지, 병력을 움직여 외부의 이익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문왕(文王)이 답장하여 말했다.

- 무릇 정사를 처리하는 사람은 뜻을 굽히고 순종하는 자가 많고, 논리와 사실을 함께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자는 드뭅니다. 나는 그대의 충심과 우애에 깊이 감동되었습니다. 항상 규정지어 제시할 때에는 당신이 확신하는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 후 등유 등은 결국 투항하지 않았다.


사마표 전략에는 왕기의 이일이 기록되어 자세하게 전한다.

경원2년(서기 261년) 봄 3월 양양태수 호열(
胡烈; 호분의 아들)이 표를 올렸다.


「오적(오장) 등유(鄧由)와 이광(李光) 등의 무리가 18 둔전 지역이 귀화하여 오기로 모의하고서 사자를 파견하고 인질을 보내왔습니다. 군의 병사로 하여금 강에서 맞이하여 뽑아버리려고합니다.」


대장군 사마문왕(司馬文王)이 이를 들었다. 정남장군 왕기(王基)의 제군에게 조서를 내려 호열로 하여금 1만의 군을 감독케하여 지름길로 저수(沮水 - 저장하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강릉의 서쪽으로 흐르다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지류)로 가서 형주 의양 남쪽에 의성에 주둔해 영접케하였다.


왕기는 적의 사항을 의심하여 관군이 이르도록 꾀어내는것에 역마를 달리게 하여 문왕을 만류해 등유등의 의심되는 상황을 말하였다

"또 마땅히 분명해져야 할 것이니 아직은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깊이 들어가서 이에 호응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又曰:『夷陵東道,當由車御,至赤岸乃得渡沮,西道當出箭谿口, 乃趣平土,皆山險狹,竹木叢蔚,卒有要害,弩馬不陳。今者筋角弩弱,水?方降,廢盛農之務,?難必之利,此事之危者也。昔子午之役,兵行數百里而?霖雨, 橋閣破壞,後糧腐敗,前軍縣乏。姜維深入,不待輜重,士?飢餓,覆軍上?。文欽、唐咨,?吳重兵,昧利壽春,身沒不反。此皆近事之鑒戒也。嘉平以來,累有 內難。當今之宜,當?安社稷,撫寧上下,力農務本,懷柔百姓,未宜動?以求外利也。得之未足?多,失之傷損威重。』文王累得基書,意疑。尋?諸軍已上道 者,且權停住所在,須後節度。基又言于文王曰:『昔漢祖納?生之說,欲封六國,寤張良之謀,而趣銷印。基謀慮淺短,誠不及留侯,亦懼襄陽有食其之謬。』文 王於是遂罷軍嚴,後由等果不降。」

이 해, 왕기가 죽었고 사공(司空)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경후(景侯)라고 했다. 아들 왕휘(徽)가 후사를 이었지만, 일찍 죽었다.

함희(咸熙) 연간, 다섯 등급 작위 제도가 제정되었는데, 왕기가 이전 시대에 훈공이 빛났으므로 왕기의 손자 왕이(?)를 바꿔 후로 봉하고, 동무(東武)의 남은 식읍을 한 아들에게 하사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주었다. 진(晉) 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조서를 내렸다.

- 고(故) 사공(司空) 왕기(王基)는 덕행이 현저했으며 공훈을 세웠고, 또 몸을 닦아 청결하고 소박하였으며 이익을 얻는 산업을 행하지 않았고, 오랫 동안 중요한 관직에 있었지만 집에는 사사로이 축적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몸은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행위는 더욱 빛나고 있으니 세속을 격려할 만한 인물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노비 두 명을 그의 집에 하사한다.

- 평하여 말한다

서막(徐邈)은 청결하고 통달하였고, 호질(胡質)은 평소하는 일이 바르고 순수했으며, 왕창(王昶)은 군주를 보좌하여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식견과 도량을 갖고 있었고, 왕기는 학문과 품행이 곧고 결백했다. 이들은 모두 지방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사람들에게 칭송되는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들은 국가의 훌륭한 신하이며 당시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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