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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屈原(굴원)에 대하여 (7)
작성자 소위2영자장애 작성일 2013-12-28 20:09 조회수 8
              屈 原 (굴원)  

 

楚(초)나라의 忠臣(충신) 政治家(정치가) 詩人(시인)이며, 楚辭文學(초사문학)의 創始者(창시자)로 離騷(이소), 九歌(구가), 九章(구장),漁父詞(어부사),天文(천문),遠遊 (원유),卜居(복거) 25篇(편)이 傳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悲運(비운)의 詩人(시인)이다. 

 

屈原은 이름이 平(평), 字는 原(원), 靈均(영균)이며, 故鄕(고향)은 楚(초)의 서울인 郢(영)(호북성 강릉현)에서 王族인 高陽氏(고양씨: 五帝顓頊의 姓氏) 伯庸(백용)은 아들을 무척 아껴주었고, 누님은 어린 平의 性格(성격)이 剛直(강직)하여 외톨이가 된 동생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楚宣王 27年. BC 343年 出生) 

 

楚의 懷王(회왕)과 頃襄王(경양왕)을 섬겼으며, 행동은 忠貞(충정)하고, 辯才(변재)가 있어, 博學多識(박학다식), 見聞(견문)이 넓고, 記憶力(기억력)이 뛰어나 治亂(치란)에 밝아, 懷王의 信任(신임)을 받아서 26歲(懷王11年. BC 318年)에 左徒(좌도:丞相(승상) 다음)로 王과 國事(국사)를 論(론)하고 賓客(빈객),諸侯(제후)들을 應待(응대)하였다. 王命(왕명)으로 憲令(헌령 :법안입안)을 하던 中, 草藁(초고)가 되기 전에 上官大夫(상관대부) 靳尙(근상)이 이를 보고 가로채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주지 않아, 靳尙의 讒訴(참소)로 懷王의 노여움을 사 職을 잃고 소원해 졌다. (懷王13-15年. BC 316-314) 

 

屈原은 이때 그의 불후의 명작 “離騷經(이소경)”으로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였는데, “쫓겨나서 이별한 것 때문에 마음이 근심스러웠으나 오히려 곧은 것으로 임금을 諷諫(풍간)한다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다. 司馬遷(사마천)은 史記(사기) 屈原賈生列傳(굴원가생열전)에서, “굴원은 도를 바르게 행하고 행동을 굳게 하며,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그 임금을 섬겼지만 참소하는 사람들은 이를 이간하여 곤궁에 처했으니, 믿음이 있는데도 의심을 받고, 충성되면서도 비방을 받았으니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라 말하며 離騷에 관해 말하였다. 

 

屈原은 親濟派(친제파)로 濟나라와 연합하여 秦(진)나라를 대항해야 한다고 했었으나 조정의 실권은 親秦派(친진파)가 득세하여, 秦의 張儀(장의)가 6백리 땅을 주겠다는 異說(이설)에 속아 제나라와 국교를 끊었고, 속은 사실을 안 懷王은 대노하여 秦을 치게 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8만 대군이 죽고 漢中地(한중지)를 빼앗기고, 魏(위)나라가 습격해오고 楚는 곤경에 처했으나 濟나라는 도와주지 않았다. 

(회왕 16년-17년. BC 313-312년) 

 

楚 懷王은 지난날을 후회하고 屈原을 불러들여 濟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秦은 漢中地를 돌려준다는 구실로 강화를 청했으나, 楚懷王은 땅(한중지)보다 장의를 내놓으라 하니, 楚에 온 張儀는 懷王의 寵姬(총희) 鄭袖(정수),

子蘭(자란)과 내통하여 그를 다시 놓아주니 장의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왜 장의를 죽이지 않았냐고 했으나 멀리 도망간 이후였다. 다시 신임을 받아 三閭大夫(삼려대부: 王族3姓(昭소,屈굴,景경)을 統轄하는 직책)가 되었다.(회왕 17년) 

 

이후, 楚는 외세의 침략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였던 차, 

秦昭王이(진소왕) 초왕족의 딸과 혼약을 맺고자 회왕을 진나라에서 만나자고 하여, 屈原은 가지 말라고 諫(간)하다가 鄭袖, 子蘭(자란:왕의 둘째아들),근상등의 친진파의 참언으로 쫓겨아고, 결국 회왕은 진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자, 회왕의 큰아들 頃襄王(경양왕)이 뒤를 잇고 자란이 令尹(영윤:승상)이 되었다. 

경양왕 3년(BC 296년)에 회왕이 秦에서 객사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쌓이고 秦과 국교를 단절하고, 屈原은 다시 소환되었으나 경양왕 7년(BC 292年 )秦과 국교가 재개되자 다시금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屈原은 비통과 울분에 싸여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 바라며, 머리를 풀어 흩트리고 수척한 몸으로 沼澤地(소택지)주변을 10여년 방황하며 “어부사”“천문”을 지었고, 마지막으로“회사의 부”를 남기고, 음력 5월 5일. 汨羅水(멱라수)에 그의 고결한 성품대로 돌을 안고 몸을 던졌다. (史記에 그의 卒年(졸년)이 경양왕 14년. BC 285年 59세 으로 되었는데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이치에 맞는다.) 

 

屈原의 楚辭(초사)란 초나라 문학으로, 詩經(시경)이 북방문학을 대표하는 4언 위주의 시가인 반면, 楚辭는 남방문학을 대표하는 6언 위주의 장시에 음조중첩이나 구속이 없고 綺艶(기렴)하게 표현된 낭만적 문학으로, 嚆矢(효시)는 구가(구가)이다. 초사는 중국문학의 모든 장르 賦(부),七言詩(칠언시), 騈儷文(변려문), 小說(소설),戱曲(희곡)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屈原의 작품은 삼국시대 昭明(소명)의 文選, 三國史記(삼국사기) 列傳(열전) 등에 있어 신라에서 교재, 고시과목으로 널리 읽혀졌으며, 高句麗(고구려), 高麗時代(고려시대) 圃隱(포은) 정몽주 의 사미인사(사미인사),牧隱(목은) 이색의 유수사,산수사,영수사 등의 초사체 작품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은 굴원의 사미인에서 영향을 받았고, 이지봉,장계곡,신청천,이성호,김인후등의 글에 초사의 영향을 받았고, 김만중은 송강의 사미인곡을 조선의 한글이소라 한바 있다. 

 

현세 중국학자들은, 호메로스(호적의 독초사), 단테(조경심의 중국문학사), 괴테(유대걸의 중국문학발전사), 고대 희랍신화와 유럽신화(현주의 고대신화)와 비교하여 일맥상통한 점과 유사점을 제시하였다
(출저):[직접서술] 블로그 집필 - http://blog.naver.com/hotsun111.do class='lime' target=_blank>절차탁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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