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屈原(굴원)에 대하여 (1) | |||||
작성자 | 소위2영자장애 | 작성일 | 2013-12-28 18:45 | 조회수 |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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屈原者, 名平, 楚之同姓也.1) 為楚懐王左徒.2) 博聞彊志, 明於治亂, 嫺3)於辭令. 入則與王図議國事, 以出號令;出則接遇賓客, 應対諸侯. 王甚任之. 굴원(屈原)의 이름은 평(平)으로 초(楚)나라 왕실과 동성(同姓)이다. 그는 초 회왕(楚懷王)의 좌도(左徒)였다. 그는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으며, 치란(治亂)에 밝았고, 문사(文辭)에도 능숙했다. 입조(入朝)해서는 임금과 국사를 도모해 이로써 명령을 내렸으며, 나가서는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응대했다. 그리하여 왕은 그를 매우 신임했다. 上官大夫與之同列, 爭寵而心害其能. 懐王使屈原造為憲令, 屈平屬草稿4)未定. 上官大夫見而欲奪之,5) 屈平不與, 因讒之曰:「王使屈平為令, 衆莫不知, 毎一令出, 平伐其功, (曰)以為『非我莫能為』也.」王怒而疏屈平. 상관대부(上官大夫)는 그와 동등한 지위였는데, 서로 왕의 총애를 다투게 되자 마음속으로 굴원의 재능을 시기했다. 회왕이 굴원에게 헌령(憲令)을 만들도록 해, 굴원이 초안을 아직 완성하지 않았을 때, 상관대부는 그 사실을 알고 그 일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굴원이 넘겨주지 않자, 이를 연유로 그를 다음과 같이 참소했다. “대왕께서 굴평(屈平)에게 법령을 만들게 하신 일은 모르는 자가 없는데, 법령이 나올 때마다 굴평은 자기의 공적을 자랑해, 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라 했다. 회왕은 분노하여 굴원을 멀리했다. 屈平疾王聴之不聡也, 讒諂之蔽明也, 邪曲之害公也, 方正之不容也, 故憂愁幽思而作離騒.6) 離騒者, 猶離憂也. 夫天者, 人之始也;父母者, 人之本也. 人窮則反本, 故勞苦倦極, 未嘗不呼天也;疾痛慘怛,7) 未嘗不呼父母也. 屈平正道直行,8) 竭忠盡智以事其君, 讒人閒之, 可謂窮矣. 信而見疑, 忠而被謗, 能無怨乎? 屈平之作離騒, 蓋自怨生也. 國風好色而不淫, 小雅怨誹而不亂.9) 若離騒者, 可謂兼之矣. 上稱帝嚳, 下道斉桓, 中述湯武, 以刺世事. 明道徳之広崇, 治亂之條貫, 靡不畢見. 其文約, 其辭微, 其志絜, 其行廉, 其稱文小而其指極大, 挙類邇而見義遠. 其志絜, 故其稱物芳. 其行廉, 故死而不容自疏. 濯淖10)汚泥11)之中, 蟬蛻於濁穢,12) 以浮遊塵埃之外, 不獲世之滋垢, 皭然13)泥而不滓者也.14) 推此志也, 雖與日月爭光可也.15) 굴원은 왕이 한쪽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것과, 아첨하는 무리들이 왕의 총명을 가로막는 것과, 사악하고 비뚤어진 무리가 공명정대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단정하고 정직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애통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수와 근심으로 인해 「이소(離騷)」를 썼다. ‘이소’는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음을 말한다. 대저 하늘은 사람의 시초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근본을 돌이켜보는 까닭에, 힘들고 피곤할 때에 하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참담해지면 부모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굴원은 올바른 도리를 곧게 실천해, 충성을 다 바치고 지혜를 다 발휘해 그 임금을 섬기었는데, 도리어 군주와 그의 사이가 이간질을 당해, 궁지에 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았고, 충성을 바쳤으나 비방을 당하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굴원이 지은 「이소」는 본디 이런 원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국풍(國風)」은 사랑을 읊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았고, 「소아(小雅)」는 원망과 비난을 담고 있으나 반란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 「이소」와 같은 것은 그 두 가지를 다 겸한 것이라고 하겠다. 위로는 제곡(帝嚳)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 환공(齊桓公)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을 서술해, 이를 통해서 세상 일을 풍자한 것이다. 도덕성의 넓은 숭고함과 치란(治亂)의 관례들을 밝히면서, 언급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문장은 간략하되, 그 내용은 자세하고, 그의 의지는 깨끗하며, 그의 행동은 겸손하다. 그 문장에서 작은 것을 비유했으나 그것이 지칭하는 것은 매우 크며, 사소한 예를 들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원하다. 그의 의지가 깨끗했기에 그가 비유한 사물들이 향기를 발하고, 그의 행동이 겸손했기에 죽을지라도 고국을 멀리하려 하지 않았다. 진흙구덩이에 빠져 더럽혀질지라도,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세속의 외부로 헤쳐 나와서 세속의 쌓인 때를 덮어쓰지 않았으니, 그는 결백하게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지조를 미루어보건대, 그야말로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屈平既絀, 其後秦欲伐斉, 斉與楚従親,16) 恵王患之, 乃令張儀詳去秦, 厚幣委質事楚, 曰:「秦甚憎斉, 斉與楚従親, 楚誠能絶斉, 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楚懐王貪而信張儀, 遂絶斉, 使使如秦受地. 張儀詐之曰:「儀與王約六里, 不聞六百里.」楚使怒去, 帰告懐王. 懐王怒, 大興師伐秦. 秦発兵撃之, 大破楚師於丹、淅,17) 斬首八萬, 虜楚將屈匄,18) 遂取楚之漢中地.19) 懐王乃悉発國中兵以深入撃秦, 戦於藍田. 魏聞之, 襲楚至鄧.20) 楚兵懼, 自秦帰. 而斉竟怒不救楚, 楚大困. 굴원이 파면되자, 그 후 진(秦)나라는 제(齊)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제나라는 초 나라와 연맹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진 혜왕(秦惠王)은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장의(張儀)에게 거짓으로 진나라를 떠나, 후한 예물을 바치고 초 나라를 섬기며 “진나라는 매우 제나라를 싫어하고 있으며, 제나라와 초 나라가 연맹을 맺고 있으나, 초 나라가 만약에 제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할 수만 있다면 진나라는 상(商)과 오(於) 지역의 6백리를 바치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했다. 초 회왕은 욕심스레 장의를 믿고서, 마침내 제나라와 단교했고, 사신을 진나라로 파견해 땅을 받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장의는 교활하게 “나 의(儀)는 초 나라 왕과 6리를 약속했지, 6백리를 약속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초 나라의 사신은 노하여 돌아와서 회왕에게 보고했다. 회왕은 격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진나라도 이에 군대를 동원해 맞서 싸웠는데, 단(丹)과 석(淅)에서 초 나라 군대를 격퇴시켰으며, 8만 명의 목을 잘랐고, 초 나라의 장수 굴개(屈匄)를 사로잡아, 마침내 초 나라의 한중(漢中) 지역을 탈취했다. 회왕은 이에 격분해 전국의 군대로 하여금 진나라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공격해, 남전(藍田)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위(魏)나라는 그 소식을 듣고, 초 나라를 습격해 등(鄧)에까지 이르렀다. 초 나라의 군대는 질겁을 하고, 진나라로부터 철수했으나, 그때 제나라는 끝내 노하여 초 나라를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초 나라는 몹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굴원 [屈原] (사기, 사마천, 김영수, 20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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